
죽음이라는 절대적 평등 앞에서 물어보는 인간의 존엄과 현대 사회의 질곡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평소에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곤 합니다. 아침 일찍 울리는 알람 소리에 번쩍 눈을 뜨고, 매일 똑같은 지하철과 버스에 몸을 실으며, 통장 잔고의 숫자를 늘리거나 타인의 인정에 목을 매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렇게 바쁘게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현대 문명 속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철저히 은폐되거나 병원의 서늘한 하얀 벽 뒤로 격리되어 버렸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 자체를 기분 나쁜 일, 혹은 재수 없는 상상쯤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롭 라이너 감독의 영화 <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은 바로 이 은폐된 죽음이라는 거대한 실존적 진실을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 한복판으로 유쾌하면서도 서늘하게 끌어내립니다. 병원이라는 다분히 통제되고 기계적인 공간, 그것도 암이라는 불치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두 늙은 환자가 한 병실에서 만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한 사람은 평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자신의 학구열과 꿈을 묻어두었던 자동차 정비사 카터(모건 프리먼)이고, 또 한 사람은 돈으로 세상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믿어왔지만 막상 병실에는 찾아올 가족 한 명 없는 외로운 억만장자 에드워드(잭 니콜슨)입니다.
이들의 만남은 그 자체로 극단적인 사회적 계급의 충돌이자 연대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쌓아 올린 가파른 계급의 사다리도, 몇 백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자산도,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노동자의 고단함도 '6개월 남았다'는 의사의 건조한 진단서 앞에서는 완벽하게 평등해집니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묵직한 사회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현대 사회가 말하는 성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꾸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사회가 요구하는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헛헛한 깨달음을 얻는 존재에 불과한가? 영화는 두 노인이 병실 쓰레기통에 구겨 버리려 했던 노란 메모지, 즉 '버킷리스트'를 다시 줍는 순간부터 인간 존엄성을 향한 아주 특별한 반란을 개시합니다.
억만장자의 수표와 노동자의 꿈이 만날 때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가는 두 사람의 여정은 겉보기에는 화려한 세계 여행과 스릴 넘치는 액티비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스카이다이빙을 하며 허공에 몸을 던지고, 카체이싱을 즐기며,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인도 타지마할의 웅장함 앞에 섭니다. 하지만 이 화려한 볼거리의 이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단순한 관광이 아닌 '탈출'이자 '탈영'의 행위입니다. 카터는 평생 자신을 짓눌러온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과 의무감으로부터 탈출한 것이고, 에드워드는 모든 것을 돈으로 통제하려 했던 통제욕과 고독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특히 두 사람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이집트 피라미드 정상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나누는 대화는, 두 인물이 마침내 각자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결정적 신호탄입니다. 평생 서적을 탐독하며 지식을 쌓았으나 현실의 벽에 막혔던 카터가, 옆에 앉아 카푸치노나 찾고 있던 에드워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옛 이집트인들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옛날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어 영혼이 천국 문 앞에 다다르면, 그곳을 지키는 신이 딱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고 믿었지. 첫째, '자네 삶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렸는가?' 둘째, '자네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도 기쁨을 주었는가?'"
이 말에 억만장자 에드워드는 평소처럼 까칠한 농담으로 넘겨버리려 하지만, 결국 입 다물고 깊은 침묵에 빠져듭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최상위 포식자로 살며 수많은 기업을 사들이고 사람들을 해고했던 그였지만, 정작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영혼이 춤추는 기쁨을 느껴본 적도,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진실한 기쁨을 전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카터의 이 질문은 에드워드의 물질적 권력을 한순간에 무력화시키며, 두 사람을 영혼 대 영혼의 대등한 위치로 높여놓습니다.
그러나 비평적인 시각으로 이 영화를 한층 더 파고들면, 명확한 한계점 또한 눈에 들어옵니다. 카터와 에드워드가 보여주는 이 찬란한 해방의 여정은, 역설적이게도 에드워드가 소유한 '막대한 자본'이 없었다면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했을 판타지라는 점입니다. 전용기를 타고 세계를 누비며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자유는 결국 금전적 여유가 보장된 이들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적 낭만주의일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 시한부 판정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할 여유가 아니라, 천문학적인 병원비 걱정과 남겨질 가족에 대한 죄책감으로 귀결되는 것이 쓸쓸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삶의 소외를 비판하는 듯하지만, 그 소외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다시금 자본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는 아이러니한 구조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오는 연습
누구나 가슴속에 비행기 티켓 한 장쯤은 품고 살아갑니다. 저 역시 수년 전, 매일같이 쏟아지는 업무와 끊임없는 성과 압박 속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숨 가쁘게 챗바퀴를 돌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처리해야 할 이메일 수십 개와 회의 일정이 머릿속을 지배했고, 밤늦게 퇴근하는 길에는 내가 지금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조차 아득해지곤 했습니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번듯한 직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동안 정작 내 마음이 무슨 소리를 내고 있는지 들을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건강하던 지인의 갑작스러운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좀 더 자리 잡으면 여행 가야지",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하고 싶은 거 해야지"라며 모든 행복을 미래로 유예하던 그분이었기에, 그 허망한 이별은 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날 밤, 저는 오래된 노트 하나를 꺼내어 무작정 글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타인의 시선이라는 엄격한 감옥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로 존재할 때 느껴지는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깨달은 것은, 버킷리스트라는 것이 꼭 에베레스트산을 등반하거나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것처럼 거창하고 비싼 것일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퇴근길 무심코 지나치던 길모퉁이 작은 카페에서 혼자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 수년 동안 오해가 생겨 연락을 끊었던 옛 친구에게 먼지 털듯 안부 문자 한 통을 먼저 건네는 일, 혹은 해 질 녘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며 내 숨소리에 집중해 보는 일. 이 소소하고도 간절한 순간들이야말로 우리가 매일매일의 고단함 속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진짜 리스트들이었습니다. 카터와 에드워드가 병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서로의 깊은 상처를 보듬기 시작했던 것처럼, 우리 삶의 진정한 전환점은 엄청난 사건이 아니라 내 삶의 주도권을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 되돌려주는 그 조용한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마침내 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온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눈 덮인 웅장한 네팔의 산맥 꼭대기에 두 노인의 유해가 든 조그마한 통이 서로의 곁에 다정하게 안치됩니다. 에드워드의 비서였던 매튜가 빛바랜 노란 종이의 마지막 항목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키스하기"를 펜으로 지워나갈 때, 우리는 이들이 완수한 여정이 단순한 '죽기 전 버킷리스트 채우기'가 아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인간이 서로의 가슴에 남긴 가장 깊은 온기이자, 타인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 자기 구원의 서사였습니다.
삶의 끝자락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늘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순간의 바로 밑바닥에 맞닿아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남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기준과 정답지에 내 인생을 맞추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지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진짜 기쁨은 무엇입니까? 오늘 하루만큼은 타인의 기대라는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그동안 고생 많았던 나 자신에게 진심 어린 안부 한 마디와 소박한 자유를 선물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웅장한 피라미드 위가 아니더라도, 당신이 서 있는 지금 그 자리에서 시작되는 아주 작은 한 걸음이 당신의 삶을 빛나게 만들어 줄 가장 완벽한 버킷리스트의 첫 줄이 될 것입니다.
참고 : https://www.youtube.com/watch?v=UvdTpywTmQg ,, https://www.youtube.com/watch?v=5EnApXG--7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