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이 영화를 그냥 오래된 서부극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막상 틀어놓고 나서야, 이게 단순한 총잡이 영화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1969년 개봉한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는 조지 로이 힐 감독이 기존 서부극의 문법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제게 꽤 오래 남는 숙제 하나를 던져줬습니다.

아메리칸 뉴시네마가 서부극을 해체한 방식
이 영화가 개봉된 1969년은 할리우드가 크게 흔들리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스튜디오 시스템이 무너지고, 젊은 감독들이 기성 장르의 문법을 뒤집기 시작한 시대였죠. 이 흐름을 아메리칸 뉴시네마(Hollywood Renaissance)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아메리칸 뉴시네마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향을 받아 할리우드 내부에서 일어난 작가주의적 영화 운동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영웅은 반드시 이긴다'는 공식을 거부하고,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쏟아지던 시절입니다.
<내일을 향해 쏴라>는 바로 그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폴 뉴먼이 연기한 부치 캐시디와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기한 선댄스 키드는, 제가 익숙하게 알던 서부극의 무뚝뚝한 영웅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들은 쫓기면서도 농담을 건네고, 위기 앞에서 계획 대신 즉흥을 선택합니다. 버트 바카락의 명곡 "Raindrops Keep Fallin' on My Head"에 맞춰 자전거를 타는 장면은, 제가 직접 봤을 때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서부극에 저런 장면이 나온다는 게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았습니다.
버디 무비(Buddy Movie)라는 장르적 틀도 이 영화가 만들어낸 공식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버디 무비란 성격이 다른 두 인물이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며 유대를 쌓아가는 서사 구조를 가리킵니다.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티키타카는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개봉해도 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버디 무비의 낭만, 그리고 쫓기는 자의 감각
영화 내내 부치와 선댄스는 쫓깁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추적자들이 밤낮없이 그들의 뒤를 따라옵니다. 처음엔 저도 그 추적 장면을 단순한 액션으로 봤는데, 보다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끈질긴 추적은 '시대가 개인을 압박하는 방식'의 은유였습니다.
수년 전, 제 삶이 그 장면과 정확히 겹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효율과 속도만을 강요하는 환경 안에서, 제가 가진 고유한 속도와 방식은 자꾸 걸림돌처럼 취급되었습니다. "이제 내 방식은 구식인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 물음은 꽤 오랫동안 저를 짓눌렀습니다. 영화 속 부치가 "도대체 저 자들이 누구야(Who are those guys?)"라고 반복해 묻는 장면이 유독 가슴에 박혔던 이유가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인상적인 건, 두 주인공이 그 추적 속에서도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볼리비아로 무대를 옮긴 뒤에도 그들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서사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라는 기법이 여기서 빛을 발합니다. 서사적 아이러니란 관객은 결말의 비극을 예감하지만, 인물들은 그것을 모른 채 행동하는 구조를 말합니다. 덕분에 그들의 유쾌한 태도가 오히려 더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경험상 이런 구조의 영화가 가장 오래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웃다가 끝나고 나서 뭔가 허전한, 그 감각 말입니다.
역사적 낭만화의 함정 — 이 영화의 한계
이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솔직히 제가 불편하게 느꼈던 부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는 실존 인물입니다. 실제로는 와일드 번치(Wild Bunch)라는 강도단을 이끌며 은행과 열차를 수없이 털었던 범죄자들이었습니다.
영화는 이 사실을 슬쩍 희석시킵니다. 폭력과 약탈을 일삼던 이들의 삶을 청춘의 반항과 자유로 재포장하고, 그들을 쫓는 법과 시스템은 일방적으로 냉혹한 가해자처럼 묘사합니다. 낭만화(romanticization)가 과도하게 작동한 셈인데, 낭만화란 실제의 어둡고 복잡한 면을 걷어내고 이상적이거나 감성적인 측면만을 부각하는 서사 전략을 말합니다. 이 전략이 관객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끌어당기는 건 맞지만, 동시에 역사적 비극성을 지우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뉴욕 타임스>의 당시 평론가 빈센트 캔비도 이 영화가 두 주인공을 지나치게 매력적으로 포장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출처: The New York Times). 그 비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제 경우엔 영화를 본 뒤 실제 역사를 따로 찾아봤는데, 두 인물이 저지른 사건들은 스크린 위의 이미지와 꽤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 간극을 알고 나서 다시 영화를 떠올리면, 이 작품이 선사하는 카타르시스가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된 감상주의(sentimentalism)인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영화를 여전히 높이 평가합니다. 역사적 정확성과 영화적 감동은 반드시 같은 방향을 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보는 사람이 그 거리를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는 실제 강도단 와일드 번치(Wild Bunch)의 실존 인물이다
- 영화는 이들의 폭력과 범죄를 낭만화하여 역사적 비극성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받는다
- 법과 추적 시스템을 단순한 악으로 묘사한 편향된 서사라는 지적도 존재한다
- 그러나 '시대의 압박 앞에서 잃지 않은 인간의 낭만'이라는 테마는 시대를 초월한 공감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가 제 삶에 남긴 각성
제가 이 영화를 처음 제대로 본 건, 삶의 방향을 잃고 꽤 오랫동안 방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빠르게 변하는 환경 속에서 내 속도와 방식이 도태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남들의 기준에 맞추려 할수록, 제 삶이 본래 가지고 있던 색깔이 점점 옅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이 영화가 던진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치와 선댄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의 방식을 잃지 않았는데, 나는 압박 앞에서 무엇을 포기하고 있었는가. 그 질문이 제게 꽤 오래 남았습니다. 영화 이론에서는 이를 인물의 주체성(agency)이라고 표현합니다. 주체성이란 외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부치와 선댄스는 결말에서 비극을 맞이하지만, 그들의 주체성은 마지막 프레임까지 살아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나서, 사회의 속도에 쫓기는 것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거창한 결심이라기보다, 제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다시 쌓아 올리기로 한 정직한 선택이었습니다. 그 선택 이후로 저를 짓누르던 자책감이 조금씩 옅어졌습니다. 세상의 잣대로 제 삶을 재는 일을 멈추자, 오히려 제가 가진 강점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심리학회(APA)의 회복탄력성 연구에 따르면, 외부 압력에 반응하는 방식보다 자신의 가치 기준을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 회복력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부치와 선댄스가 스크린 안에서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이었고, 저는 그 사실을 영화를 통해 먼저 느꼈습니다.
결론
<내일을 향해 쏴라>는 서부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시대의 압박 앞에서 자신의 방식을 끝까지 고수하려 했던 두 인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적 낭만화라는 한계를 안고 있는 작품이지만, 그 한계를 인식하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입체적인 감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세상의 무자비한 변화에 당신의 낭만을 빼앗기지 마라. 비록 결과가 비극적일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의 삶을 향해 총을 겨누는 자만이 영원한 자유를 얻는다."
세상이 그어놓은 기준이나 비정한 효율성에 당신의 가치를 맞추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이 비록 코너에 몰리고 거친 바람이 불어 올지라도 그 속에서 잃지 않는 당신만의 유머와 낭만이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어 당신을 영원히 빛나게 만드는 진짜 인생의 미학입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가 진짜 힘을 발휘하는 건 스크린을 보고 나서입니다. 부치와 선댄스의 마지막 프레임을 떠올리며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그 순간이, 이 영화가 남기는 가장 오래가는 잔상입니다. 보신 적 없다면, 지금 바로 보셔도 늦지 않습니다.